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을 읽고 시처럼 외우는 문장이 있다.


여고생들이 한꺼번에 까르르 웃을 때, 어느 한 아이가 예쁜 것이 아니라 그들 집단 전체가 예쁘다. 언젠가 설악산에 갔을때 수학 여행 온 여고생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여고생들은 숲 속으로 흩어져 끼리끼리 둘어앉아서 점심을 먹거나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아이가 웃으면 일제히 따들 따라 웃어댄다. 나는 그 아이들이 예뻐서 등산길도 잊어버린 채 한동안 주저 앉아 넋을 잃고 바라 보았다.

<밥벌이의 지겨움 中 이런 여자가 좋다>


나도 웃는 여고생들을 바라볼때 가장 행복하다. 하지만 그 걸 표현해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뭔가 입안에서 맴돌기는 하는데 입밖으로 나오질 않아 답답했다.

막혔던 속이 이 글을 읽고 확 뚫렸다. 내가 끄집어 내고 싶었던 말이 간결한 문장안에 다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고생들이 한꺼번에 까르르 웃을 때, 어느 한 아이가 예쁜 것이 아니라 그들 집단 전체가 예쁘다.'는 문장이 딱 눈에 들어온 순간 '바로 이거다!'며 환호했다. 이 문장을 찾기 위해 나는 긴 세월을 머리를 쥐어 뜯으며 보냈다. 잊지 않기 위해 시처럼 외우고 또 외우고 있다. 

이 글을 외우면서 혹시 김훈도 나처럼 웃는 여고생에 대한 페티시가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등산하다 우연히 여고생들 웃는 거 한번 보고 느낌이 와 쓴 글 같진 않았다. 그래서 찾아봤는데 이 아저씨도 웃는 여고생들 보는 게 인생의 낙이었다.


일산에 사는데 집 가까이 있는 여자 고등학교에 자주 들러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 수십명이 4~5초만에 웃음을 전파시키는 모습을 보며 꽃이 피는 느낌을 받습니다. 졸업식날엔 서로에게 립스틱을 발라주며 장엄한 의식을 행하더군요. 나는 이런 모습에서 거역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봅니다.

여고생들이 까르르 웃어요. 그럼 그게 순식간에 전파됩니다. 마치 꽃이 피는 것 같아요. 너무 좋아요. 그런 걸 보면 인간의 아름다움을 의심하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자주 보러 학교를 가는데요. 경비원 아저씨가 저를 아주 이상하게 봅니다.(여기서 사람들 또 빵 터짐)그런데 이런 풍경과 이런 아이들이 어디에나 있지 않습니까. 이게 우리 복입니다.



여고생들 웃는 모습이 아무리 보기 좋아도 그렇지 

그 나이가 되서 여고를 출입한다니

예술가는 괴짜 기질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 아저씨는 정말 강적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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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서시」中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국민학교 5학년 어느날. 학교가는 길에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종이를 펼쳤다가 난생 처음 좁쌀만한 소름이 팔뚝을 휘감는 것을 봤다.   







▶ 김광균 「설야」中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중학교 2학년때 였을거다. 문제집 풀다가 슬 뻔했다 -_- 며칠동안 한복을 곱게 벗는 고전 미인이 머리속에서 아른아른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中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부분만 발췌해서 돌아다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게 전부다. 짧지만 급소를 정확히 가격당한 것처럼 큰 충격과 울림을 받았다.  








▶ 신경림「가난한 사랑 노래」中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시인은 대시인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이건 시가 아니라 흘러간 트로트 가사 같아서 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마지막 '뒤집기'를 보면서 역시 대시인이라는 찬사와 감동이 저절로 터졌다.








▶ 여사당 「자탄가」中

이내 손은 문고리 인가/ 이놈도 잡고 저놈도 잡네/ 이내 입은 술잔인가/ 이놈도 빨고 저놈도 빠네/ 이내 배는 나룻배인가/ 이놈도 타고 저놈도 타네

처음에는 우스운데 조금 지나가면 슬퍼진다. 장자연 사건때 많이 떠올랐다.









▶ 서정주 「귀촉도」中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바보 노무현이 한 줌의 재가 되어 떠난 날. tv에서는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시민들이 오열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나는 멍하니 쳐다 봤다.  나무토막처럼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런데 불현듯 귀촉도의 저 마지막 구절이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가는거다. 그 순간.....









▶ 서정주 「문둥이」中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문둥이는 짧은 삼행시다. '해와 하늘빛이/문둥이는 서러워/보리밭에 달뜨면/애기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나병 환자가 병을 위해 아기를 먹는다는 끔찍한 내용. 하지만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는 마지막 구절에서 벼락같은 슬픔을 내리쳐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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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자살한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잔인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최근 연예인들의 잇따른 자살 이후 사회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살아있을때 뭔 짓을 했건 자살하면 무조건적으로 미화만 하고 살아있을때와는 평가가 180도 달라지기도 하는데 매우 위험해 보인다.

이런 분위기는 자칫 자살이 해결책이라는 생각을 심어줘 또다른 자살을 부추기고 살아남은 자들까지 고통에 빠트릴수 있을것 같다. 안되겠다. 자살한 사람도 깔건 까야 되겠다.


안재환은 사업할 능력도 없으면서 여기저기서 빚 잔뜩 긁어다가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사업에 쏟아붓더니 감당안되니까 자기 혼자만 무책임하게 도망쳤다. 천만 만번 욕먹어도 시원치 않은 행동이다.

하지만 안재환을 욕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왜? 자살해서 '자동까임방지권' 획득했는데 누가 욕할수 있겠어.  안재환때문에 남은 인생을 지옥에서 보내게 된 가족과 채권자들만 끔찍하게 되었다. 


최진실은 데뷔초 불우한 과거를 내세운 짠순이 이미지로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려 톱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결혼하면서 그 이미지를 배반하기 시작했다. IMF로 국민들이 시름하고 있을때 초호화 결혼식을 올려서 욕먹더니, 신혼초 출연한 토크쇼에서는 TV를 보면 저 사람은 결혼식에서 축의금 얼마냈는지 다 기억난다는 망언을 해 지탄받고, 아이 낳으니까 분유 광고에서까지 거액의 출연료를 긁어내기위해 언론 플레이를 해 엄마들의 분노를 샀다.

나는 최진실이 돈 밝히는 것보단 배우로서의 성공을 위해 방송국과의 전속 계약을 두번이나 어긴 것 때문에 그녀를 삐딱하게 봤었다. 그녀는 죽기전 자신을 사채업자로 만든 세상을 원망했다고 하지만 합의한 계약을 두번이나 파기한 것이 사채보다 도덕적으로 더 큰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최진실 안티가 우글거렸던 것은 팬들이 사랑한 이미지를 배신하고 돈과 성공이면 물불 안가리는 그녀의 처신이 자초한 측면이 컷다. 그녀가 살아있을때까지는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자살하고나니까 180도 달라졌다. 최진실은 순교자고 안티들은 전부 살인자다.

자살하면 이렇게 과거에 잘못했던 기억은 사람들 머리속에서 싹 없어지고 적대자들은 살안자로 몰려 도망다녀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분위기다.

막말로 '자살할만한데?'하는 유혹이 들만하다.

이래서는 안된다. 자살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해결되는 듯한 분위기는 없어져야한다. 더 많은 자살자들을 방지하고 살아남은자들을 보호하기위해 자살자들도 짚고 넘어갈 것은 짚고 넘어가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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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만 잘되면 한국 문학도 노벨상을 충분히 받을수 있는데 그 놈의 번역이 문제란다.  노벨 문학상 수상이 실패할때마다 한국 사람들의 입에서 터지는 푸념이다. 

 한국 문학은 해외에 번역된 작품도 별로 없고  한국어의 우수하고 섬세한 표현을 외국어로 옮기기 어렵기 때문에 노벨 문학상을 못받는 것이지 한국 문학의 수준은 노벨 문학상을 받고도 남을만하는게 한국 사람들의 말이다. 

 진짜 그런걸까? 한국 작품을 번역해온 외국인들의 말을 중심으로 한번 짚어보자. 



 번역된 작품이 부족하다?

 우수한 우리 문학 작품들이 미비한 정부의 지원과 출판계의 무관심으로 해외에 거의 번역이 안된줄 알고 질타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영국인으로 16년간 한국 문학을 번역해온 서강대 명예 교수 안선재(영어명 Brother Anthony)에 따르면 한국 문학은  외국 문학에 비해 오히려 많이 번역된 수준이라고 한다. 

 - 한국 작품이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것 역시 번역의 문제 때문 아닌가.

“항상 그렇게 말한다. 2005년에 영어로만 30권이 출간됐다. 5년 전부터 70권 정도 나왔다. 다른 나라보다 많이 나오는 것이다. 터키, 인도 같은 나라에선 1년에 3~4권이 나오는 게 보통이다. 미국, 영국에서도 번역문학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 영어로 번역된 작품은 전체 작품 중에 3%이고 그중 문학작품은 1%에 지나지 않는다.”

 200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임레 케르테스라는 헝가리 작가도 불과 2권의 영문번역서만 출판되었을 뿐이었는데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에 비해 한국 작가들은

한국은 한국문학번역원이 출범한 2001년부터 정부 차원의 지원이 시작됐다. 한국문학을 소개하는 해외번역가는 현재 80여명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번역된 작품 절대량이 부족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번역조차 미미한 실정이다.

2006년 11월 현재, 해외에 번역·출간된 작품 20권을 넘긴 생존 문인은 5명에 불과하다. 소설가 이문열이 33권으로 가장 많고, 이청준(27권), 고은(25권), 황석영(23권), 박완서(20권) 순이다. 한림원이 있는 스웨덴에서 가장 많이 소개된 작가는 고은으로, 4권이 출판됐다. 2002년 ‘고은 시선’이 나왔고, ‘만인보’(2005년), ‘순간의 꽃’(2006년), ‘화엄경’(2007년)이 연달아 출간됐다.

 이 정도 수준이다.(세상에 20권 넘게 번역 출판된 작가가 5명이나 되는데 그게 적다니 -_-) 번역량이 부족해서 노벨상 못받는다는 것은 낯뜨거운 핑계다. 





 우수한  우리말을 외국어로 표현할 길이 없어서? 

 노벨문학상 얘기만 나오면 늘 나오는 예가 우리 나라는 '빨갛다' '붉으스름하다' '시뻘겋다'등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는데 영어는 그냥 red 하나라서 번역하면 우리말의 묘미가 사라진다는 거다. 그건 잘 모르는 소리다. 영어라고 red 하나만 있는게 아니다. 빨갛다- red, 붉으스름하다.-reddish, 새빨갛다- deep red, red-hot등 영어에도 세분하된 표현이 다 있다.  

 노벨 문학상 얘기만 나오면 잘 쓰지도 않는 형용사들과 언어 유희를 나열하며 (ex '사뿐히 즈려밟고' 이걸 어떻게 번역할거냐고! '고이 접어나빌레라' 이걸 어떻게 번역할거냐고!) 외국인들이 이해못할 섬세함이 우리말에 있다고  자아도취에 빠지는데 다른 나라말이라고 그나라만의 독특한 언어 유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알래스카어에는 눈이 하얗다는 표현이 무려 50여개나 된다고 한다. 

 번역 전문가들이 들으면 코웃음치는 얘기다. 번역 전문가중에는 저런 얘기 하는 사람이 없는데 꼭 중고딩 국어 선생과 일반인들만 우리말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자화자찬한다. -_-;;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작품의 역량 

“지난 35년간 제가 읽은 한국 소설 중에는 퓰리처 상이나 부커 상 후보에 오를 만한 책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시도 마찬가지로, 위트브레드 문학상 후보에 오를 만한 시집 또한 많았다고 할 수 없지요.”(케빈 오록 경희대 명예교수)

“지난 35년간 “중남미 독자들은 수준 높은 작가를 원한다. 한국의 작가와 독자들은 무턱대고 노벨상만 꿈꿀 게 아니라 우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프란시스코 카란사 페루 우나삼 대학 객원교수)

“제일 중요한 것은 작품이 돼야 한다. 그냥 보여주는 것은 문학이 아니다. 한국 문학작품에는 다큐멘터리성 작품이 너무 많다. 진짜 살아 있는 사람 이야기가 많다. 너무 단순하고 실제 생활하고 똑같다. 생활을 보여주는 드라마와 비슷하다. 문학은 현실을 뛰어넘는 픽션이어야 된다.” (서강대 명예교수 안선재)

외국인으로 오랜 시간 한국 문학을 외국어로 번역해온 번역 전문가들의 따끔한 지적이다. 한마디로 한국 문학은  수준이 안된다는거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수준이지 번역은 다음 문제다. 우리 나라는 노벨문학상 발표가 있을 때마다 번역의 잘못 때문에 올해도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고 한 탄 하는데 우선 순위가 잘못되었다.

한국 문학이 노벨 문학상을 받을려면 내부에 대한 비판이 먼저 이루어지면서 스스로 역량을 끌어올려야 한다. 허구헌날 자화자찬하고 번역만 원망 하는데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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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블로거 뉴스에

 '섹시 댄스 추는 아이 징그럽지 않나요?'

라는 글이 압도적인 추천수를 받고 베스트에 올라가 있다.

간결하고 빠르게 읽히는 글이라
 
전문을 그대로 인용해본다.




이 글 쓰신 분이나 댓글로 공감하는 분들의 심정은 알수 있을것 같다. 섹시 댄스추는 아이들이 미적 취향에도 맞지 않고 걱정스러울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친 거부감의 표현은 보기 불편하다.

그 아이들은 자기가 진정으로 좋아해서 춤을 연습하고 사람들 앞에서 추는 것이다. 그런데

'징그럽다' '눈살이 찌푸려진다' 부모 잘못 만났다'

이런 극단적인 혐오감의 표현을 본다면 오히려 아이들이 상처를 받을수 있지 않을까?

진정으로 아이들을 걱정스러워하는 마음들이라면 표현을 조심해야 할것 같다. 




그리고 이럴때마다 늘 등장하는 '아이는 아이다워야한다'는 사고도 불편하다.

아이답다는 것은 어른들만의 일방적인 기준이다.
 
아이들이 그 기준에 맞춰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른들의 이기적인 욕망일뿐이다.  

이 다음에 크면 멋진 어른이 되고 싶은게 아이들이다. 어렸을때 멋진 어른들의 모습을 동경하고 따라하는 것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가수로서 최정상의 자리에 위치한 이효리와 서인영을 여자 아이들이  따라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효리와 서인영의 춤과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어른들 욕심에 맞춰서 천진난만한 척하며 동요나 부른다면더 부자연스럽고 보기 안좋을것 같다. 




그리고 가벼운 옷차림하고 화장하고 율동하는 것은 대중 가수들의 춤만이 아니다.

이른바 '댄스 스포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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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리 댄스를 추는 초등학교 아이들이다. 의상과 춤이 연예인 가수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핫하다. 

하지만 음악화에서 문화제에서 경연대회에서 밴리 댄스를 추는 아이들은 흔히 볼수 있다. 학교에서 동아리를 만들어 가르치기도 한다. (초등학교에 방문해서 여자 아이와 밸리 댄스추는 정동영봐라 -_-)탱고나 살사등 라틴 댄스도 그렇다. 

댄스 스포츠를 추는 아이들은 '리틀 이효리'나 '리틀 서인영'보다 아이다운걸까? 나는 동의할수 없다. 기본적으로 관능을 나타낸 춤이라는 점에서 같다. 

댄스 스포츠하는 아이들보다 연예인 댄스하는 아이들이 더 시달리는 것은 대중 문화에 대한 편견과 비하도 있는 것 같아 불편하다.



지금의 30대 이상중에도 초딩때 선풍을 일으켰던 마이클 잭슨춤을 따라하면서 큰 아이들이 많다. 당시에도 어른들은 혀차면서 눈살 찌프렸지

하지만 그런 아이들중 몇몇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가수가 되기도 했다. 서태지도 마이클 잭슨을 보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던 아이들줄 한명


어차피 아이로 있는 시간 몇년 안된다. 리틀 이효리나 리틀 서인영들이 눈에 거슬린다고 동요나 부르면 좋겠다고 무언의 압박넣지 말자. 그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꿈이고 미래일수 있다


혹시 아는가

tv나와서 이효리와 서인영 따라하는 아이들중에 미래에 이효리와 서인영을 능가하는 섹시 디바가 탄생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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